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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세계 2018-6월 Image&Essay  게재글 ]

그림같은 그림

​홍해은

 

#노란색 봉을 들고 걷고 있다. 이것은 ‘무게를 지닌 밝은 노란색의 둘레가 둥근 대’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우산이나, 당구 큐대 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산이나 당구 큐대를 가지고 걷다가 이것은 그저 노랗고, 기다란 형태라고 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재미있게 생긴 ( )을/를 보고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그것은 위로 삐죽삐죽 솟아 있었고, 끝은 둥글었다. 이것의 일상적인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그 형태가 좋았으므로.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 목적도 아니었다.

 

 #그림같은 풍경을 보면, 풍경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무엇이 풍경이고, 무엇이 그림일까. 그림과 풍경은 다른 말일까. 나는 무엇을 보고,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졌을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더하기’를 하는 일이다. 무엇을 더할 것인지, 어디에 더할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피상적인 이미지들이 좋다. 너무나 흔하고 가벼운, 감각을 재빠르게 자극하는 이미지들. 우린 그것들에 둘러싸여 사니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흔하지만 구미를 당기는 광고 이미지, 이미 여러 그림들에 쓰인 취향에 맞는 색 등을 모아 그림으로 그려본다. 명시적인 이미지이건, 추상적인 붓질이건 화면에 더해지는 순간 이미지가 본래 지녔을 도구성이 사라지고, 그저 그림의 한 부분이 된다. 그림 안에서는 색이 색을 설명하고 형태가 형태를 설명한다.

 예컨대 마티스 그림에서 가져온 레드는 내 그림 속에서 다른 레드가 된다. 화면의 90%를 차지하는 레드와 20%를 차지하는 레드는 다른 색이며, 블랙 옆의 레드와 오렌지 옆의 레드도 다른 색이다. 색이 색을 지지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형태 역시 그림 속에서 조형 단위가 된다. 팔로 둥근 모양을 만들고 있는 휴대폰 이모지는 그 즉시 동그라미를 지시하고, 이모지자체의 형태를 지시하고, 보라와 노랑, 두 색으로 그려진 덩어리 그 자체가 되어, 눈의 움직임을 이끈다.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들과 색 덩어리들을 순서대로 쌓아 나간다. 마치 수채화를 그릴 때, 그릴 순서를 정하고 층을 얹어 나가듯이.

 나는 그림같은 ( )를 바라보며 더욱더 그림인 그림을 그린다. 형태는 형태의 역할을, 색은 색의 역할을 하며 그림이 되어 유희한다. 회화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계이다. 그 너머의 의미나 내용을 찾으려 한다면 쉽게 사족이 되고 만다. 보이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감각하는 가장 투명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 그 안에서 우산도, 노란색 막대도 아닌 것을 태어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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